佛/석가모니

석가모니[釋迦牟尼]

산사랑의 추억 2010. 6. 23. 17:09

석가모니[釋迦牟尼]

 

 본문

 

'불교의 창시자. 석가족 출신의 성자라는 뜻.

석가모니(釋迦牟尼)는 석가문(釋迦文) 등으로도 음사하며, 능인적묵(能仁寂默)으로 번역된다.

보통 석존(釋尊) ·부처님이라고도 존칭한다. 석가(kya)는 민족의 명칭이고 모니(muni)는 성자라는 의미로, 석가모니라 함은 석가족(族) 출신의 성자라는 뜻이다.

본래의 성은 고타마(Gotama:瞿曇), 이름은 싯다르타(Siddhrtha:悉達多)인데, 후에 깨달음을 얻어 붓다(Buddha:佛陀)라 불리게 되었다. 또한 사찰이나 신도들 사이에서는 진리의 체현자(體現者)라는 의미의 여래(如來:Tathgata), 존칭으로서의 세존(世尊:Bhagavat) ·석존(釋尊) 등으로도 불린다

 

생몰년에 관해서는 BC 463∼BC 383년설과 BC 563∼BC 483년설이 있다.

네팔 남부가 인도대평원으로 이어지는 위치에 있었던 카필라성(Kapila城)을 중심으로 사카족의 작은 나라가 있었는데, 그 국왕인 정반왕(淨飯王)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석가라는 호칭은 이 종족이름에서 연유되며, 존칭하여 석가모니라 불리는데, 석존(釋尊)이라고도 한다. 성은 고타마, 이름은 싯다르타이다. 흔히 각자(覺者;깨달은 사람)를 뜻하는 보통명사를 고유명사화하여 불타(佛陀;Buddha) 또는 불(佛)이라 하며, 다시 여래(如來;진리의 완성자) 또는 승자(勝者;Gina)라 하기도 한다.

80년의 생애는 분명한데, 몰년에 관해서는 BC 483년 무렵과 BC 383년 무렵의 2가지 설이 유력하다. 사카족은 네팔계, 따라서 몽골계 인종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나, 당시 이미 압도적인 인도-아리아문화 영역내에 있었음은 분명하다.

19세기에는 계몽사상 등의 영향 때문에 석가의 실재(實在)에 대해 의심을 품기도 했으며, 천문학상의 여러 설과 태양신화를 근거로 석가의 전기를 설명하는 학자도 있었다. 1898년 네팔의 남쪽 국경에서 하나의 납석단지[蠟石壺]가 발견되었는데, 그 표면에 새겨진 BC 3세기 이전의 글은 <이것은 석가족의 불(佛), 세존(世尊) 유골의 그릇이며, 명예로운 형제자매 처자들의 봉납(奉納)>이라고 해독되었다. 이는 원시경전의 내용과 일치하기 때문에 오랜 전승(傳承)이 여기서 확증되었다. 그 밖에 1896년에 발견된 아소카왕 비문은 석가의 탄생지 룸비니를 증명하며, 후에 다른 뼈단지[骨壺]를 발굴한 것도 있으니, 석가의 실재(實在)는 움직일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오늘날의 문헌학을 종합한다면 가장 오래된 경전은 석가의 손제자(孫弟子) 무렵에 성립했다고 한다. 즉 석가 입멸 직후에 불제자가 모여서 석가의 언행을 편집(이를 제 1 결집이라 함)하여, 그것이 구송(口誦)으로 전승되었고, 또한 확대되었다. 시대의 경과와 전파과정에서 잘못 전해지고 분식되었으며, 또한 증광(增廣) 및 변경되기도 하였다. 특히 석가에 대한 사모·존숭·신앙이 강화되어서 석가를 신비화하고 공상화했으며, 때로 잡다한 요소가 부가되었다. 또한 교설(敎說)도 나중의 발전 성과와 뒤섞였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초기 경전은 모두 석가의 입멸 후 100년 내지 200년 무렵에 교단이 보수파인 상좌부(上座部)와 진보파인 대중부(大衆部)로 분열하고 다시 여러 갈래로 분열한 끝에 성립한 20여 개 부파 중 몇 개 부파에서 확정한 것인데, 석가의 직접적 가르침을 가려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석가는 마가다어로 가르침을 전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마가다어는 팔리어와 표준어인 산스크리트로 바뀌었고, 산스크리트는 다시 다른 속어(예컨대 간다라어 등)로 옮겨졌다. 또한 많은 것이 한문으로 번역되었으며, 일부는 티베트어로 번역되었다. 또한 일부이기는 하지만 위의 고어 사본 단편이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마가다어는 팔리어 문헌에 조금 그 어형을 남겼을 뿐이고, 마가다어의 종합된 텍스트는 현존하지 않는다. 이 초기 경전군을 아가마(Agama;傳來)라고 한다